#1.

박경재(서울 농아인협회 관악구지부 이사)씨는 자신을 부르는 수화 통역사의 다급한 손짓을 보았다.

오랜 세월 찾아 헤맨 군 복무 중인 아들의 전화였다. 아내와 헤어진 후, 홀로 키우던 아들마저 큰 다툼이 있은 후 집을 나갔다. 갑작스러운 엄마의 부재에 따른 아들의 외로움을 이해하지 못했던 그가 손찌검을 한 것이 화근이었다. 장모님과 전아내에게도 아들의 소식을 물었지만 쉽사리 찾을 수 없었다.

전화통화가 어려운 그가 작은단서를 위해서라도 헛걸음하기를 여러차례. 결국 수화통역사의 도움을 받아 군에 있는 아들의 소식을 들을 수 있었다. 군인이 된 아들과 전화통화가 첫 상봉이었지만 그마저도 수화통역의 역할이 절대적이었다.

수화통역사는 무슨 말을 전해드릴지 물어봤지만 그는 아무 말도 할 수 없었다. 쏟아지는 눈물이 켜켜히 쌓여온 그리움을 대신할 뿐이었다. 그래도 그는 수화 통역사의 도움을 빌어서라도 아들의 이야기를 들을 수 있어 행복했다.

 #2.

얼마 전, 몸이 좋지 않았던 청각 장애를 가진 노부부는 관악구 내 모병원에서 약을 처방 받았다. 꽤 규모가 큰 병원임에도 불구하고 수화통역사가 없어 부부는 진료를 받는 데 어려움을 겪었다. 약을 먹고 노부부는 결국 탈이 났고 응급실행을 해야만 했다.

 #3.

한 수화통역사는 지역관련단체들이 모인 정책토론회에서 청각장애인들을 위해 통역을 했다. 토론회가 끝난 뒤 수화통역사는 주최 측에 일급을 요구했고, 그 후 정책토론회가 있어도 비용을 부담스러워 한 탓이었는지 주최 측에서는 연락이 오지 않는다. 그리하여 정작, 복지정책의 당사자인 청각장애인들은 토론회에 참여할 수 없게 됐다. 수화통역사는 무료봉사로라도 수화통역을 이어나가지 못한 것에 후회를 한다.

 #4.

대부분의 청각장애인 산모들은 제왕절개를 통해 아이를 낳는다. 문제는 이것이 선택의 기회가 주어진 뒤에 내린 결정이 아니라는 점이다. 의사소통이 어려운 병원 측에서 자의적으로 제왕절개 분만을 강행하는 것이다.

장애인차별금지법이 시행된 지 1년 9개월이 지났지만 청각장애인들은 생활 곳곳에서 불평등을 느끼고 있다. 이 불평등이 쉽사리 해소되지 않는 근원적 원인에 소통의 부재가 있다. 청각장애인들은 우리가 쓰는 음성언어가 아닌 수화를 통해 의사소통을 한다.

눈으로 볼 수 있으니 문자를 쓰면 되지 않느냐고 반문하는 사람도 있겠지만 어려서 열병으로 청각장애를 가진 경우가 대부분인 장애인들은 한글을 배우는 것이 수화를 배우는 것보다 몇 배는 더 어렵다. 더욱이 한글을 배우게 되더라도 수화를 통해 배우기 때문에 이미 수화가 소통의 중심이 되어버린 것은 당연하다.

이렇듯 건청인(비청각장애인)이 간과하는 청각장애인의 불편은 모이고 모여 불평등으로 이어지고 있다.

관악구에만 청각장애인 2,060명

장애인들의 어려움에 정도를 따질 수는 없지만 복지편의시설 중에는 시각 장애인을 위한 중심이 많다. 청각, 언어 장애인 수(관악구, 2009년 1월 기준)는 2060명으로 시각장애인 2193명과 크게 차이가 없다.

하지만 음성문화가 중심인 한국사회에서 청각 장애인들은 복지지원에서도 또 다른 불평등으로 가중된 어려움을 겪고 있다.

한 예로, 시각장애인의 길 안내 역할을 위한 노란 점자블록은 역마다 설치되어 있고, 매 정거장마다 역명이 방송된다. 하지만 전광판으로 안내를 해주는 노선은 많지 않다. 이는 버스에서도 마찬가지다.

2명의 수화통역사가 2천명 책임져

그리고 관악구 내 청각장애인을 위한 단체는 단 한곳 서울 농아인협회(관악지부)뿐이다. 단체 내 2명의 수화통역사가 2000여명의 청각장애인을 책임지고 있으니 수가 절대적으로 부족하다.

수화통역사들은 자연스럽게 모든 불편을 해결해 줄 수 없고 우선순위를 정해야만 한다. 이런 이유때문에 밀린 공과금이 정리되지 않거나 이사 갈 집을 구하지 못하는 청각장애인들의 불편은 오랜 시간 밀려있기 일쑤다.

수적 부족때문에 <#1>의 박씨 또한 아들을 찾는 과정도 힘들 수밖에 없었다. 아들의 안부를 묻는 사소한 질문조차 직접 찾아가거나, 수화통역사를 동행해야만 했다. 자연히 아들을 소식을 아는데 더 오랜 시간이 소요될 수 밖에 없었다.

수화통역사, 늘어날 필요 있어

이런 실상을 잘 아는 서울농아인협회(관악지부)에서 직접 나서 수화통역사를 늘리기 위한 양성반 프로그램을 운영하고 있지만, 좀 더 많은 관심이 필요한 실정이다.

농아인협회 관계자는 "청각장애인이 기본적인 권리를 누리기 위해 필수사항 중에 하나가 수화통역사"라며, "지역민들의 관심과 참여가 필요하다"고 당부했다. 또한, 협소한 공간 때문에 교육이 어렵다며, 정부당국의 도움이 절실하다고 말했다.

한편, 수화통역사는 일자리창출 차원에서 접근되고 있다. 수화통역사의 진로로는 다산 콜센터의 영상상담원, 재활복지대학의 강의통역사, 영상전화 서비스 업무 등이 있다.